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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고법 항소이유 보충서-3(42개 증거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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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6-01-17 12:26 조회1,85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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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고법 항소이유 보충서-3(42개 증거 관련)

 

아래는 [42개 증거]에 대해 광주고법에 제출하는 항소이유 보충서입니다. 항소이유는 36쪽이었고, 지금 이 보충서는 50쪽입니다. 이 내용은 애국자 모두에게 필요한 지식이기에 여기에 전문을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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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5.18을 북한이 주도하지 않았다는 원심판결에 대하여

 

1) 5.18 최상위 유공자들의 공통된 증언: “521일의 군사행동은 광주사람들이 주도하지 않았다!”

 

항소이유서 제14쪽에는 피고가 수리공학적 마인드를 가지고 군 상황일지에서 추려낸 요약문이 있습니다. 이를 다시 이기합니다.

 

300명의 시위대가, 521일 오전 08시에 20사단 지휘부 차량부대가 광주톨게이트를 통과한다는 극비정보를 입수하고, 하루 전날에 [군분교]라는 작은 교량을 중심으로 하는 매복지점에 중장비들을 동원하여 가두리장을 설치한 다음 5.21.08시에 계획대로 톨게이트를 통과하는 20사단 차량부대를 습격하여 사단장 지프차를 포함한 14대의 지프차를 빼앗아 인근에 있는 군용차량 제조사인 아시아자동차 공장으로 향했고, 09시에는 또 다른 300명이 5대의 버스를 타고 아시아자동차 공장에 접근하여, 600명이 공장을 점령한 후 장갑차 4대와 군용트럭 400대를 탈취하자마자 마치 예행연습을 한 사람들처럼 곧장 전남 17개 군에 위장돼있는 44개 무기고를 불과 4시간 만에 털어 5,403정의 총기와 8톤 분량의 TNT를 탈취해가지고 전남도청에 2,100발의 폭탄을 조립해놓고, 그날 밤부터 광주교도소를 5차례 야간공격했다.

 

위 내용은 모두 사실이며, 군 상황일지로부터 뽑아낸 요약문입니다. 원고와 귀원은 이 내용을 사실로 인정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광주고등법원 제1민사부는 판결서 12쪽에서 1980521일의 위 군사행동을 광주시민이 주도했다고 판시하였습니다. “아시아자동차 군납업체로부터 탈취한 군용트럭과 장갑차는 당시 광주에 운전면허를 받은 사람들이 매우 많아서 광주인들이 충분히 몰 수 있었고, 전남지역 17개 시-군에 위장돼있는 44개 무기고를 4시간 만에 털어 5,403정의 총기를 탈취한 후 5회에 걸쳐 교도소를 야간 공격한 것도 광주인들이 충분히 할 수 있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위 행위 주체에 대해 사법부가 학자인 피고의 학설을 부정하고 다른 학설을 내놓은 것입니다. 이 법관의 학설이 얼마나 사실을 반영한 것인지 아래에 논증하고자 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광주고법의 위 판결은 명백한 진실에 절대적으로 반합니다. 692002.12. 전남대학교 출판부가 발행한 "5.18항쟁증언자료집I"의 일부이며, 여기에는 당시의 [항쟁본부] 총사령관과 그 지휘부 요원들의 증언들이 기술돼 있습니다(항쟁자료집 98-184).

 

69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항쟁본부를 구성했던 모든 지휘부 수뇌들이 1980.5.18.-24. 오전까지는 시위에 참가하지 않고, 각자도생 숨어 다니다가 524일 오후에야 한 사람씩 도청에 모여 갑론을박하다가 5.27 새벽에 진압됐다는 자기고백서입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 자료총서 1765쪽에는 5·18 주역이자 평민당 국회의원이었던정상용의 회고가 들어있습니다. “5·18의 기동타격대 구성원은 그 80%17살에서 22살 사이의 청년이었고, 대부분이 학생이 아닌 도시근로자, 노동자, 점원, 실직자, 구두닦이, 품팔이, 식당종업원 등 소외받고 억눌려왔던 기층민중이며 이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싸웠다.이 증언은 1982315일 육군본부가 발행한 계엄사(戒嚴史)’의 분석과 일치합니다. 계엄사 134쪽에는 렬시위의 전위대들이 불량배, 구두닦이, 넝마주이, 공장근로자, 전과자, 무직자들로 구

성되어 있다고 쓰였습니다. 이와 같은 20세 전후의 양아치들이 광주 현장 사진들에 나타나 있는 무장 주역들의 모습을 연기할 수는 없습니다.

 

정상용의 증언은 2002년 전남대 출판부가 발행한 [5·18 항쟁자료집](67)에도 이어집니다. “21일 누군가가 도청을 탈환했다. 이걸 장악한 사람들이 있을 거 아닌가? 도청을 장악한 사람들은 따로 있고, 우리는 사태를 수습하려고 도청으로 간 거다. 도청을 장악한 사람들은 위엄 있는 높은 관료 정도로 보이는 사람들인데 그들이 우리에게 곧 계엄군이 들어올 것이니 학생들은 나가라고 말했다. 23일에 보았던 위엄 있는 국장급 공무원들24일부터는 보이지 않았다.” 항쟁본부 주역들이 5.23.에 도청에 갔지만, 위엄 있어 보이는 국장급 거물들이 지키고 있어서 발길을 돌렸고, 5.24에야 비로소 비어져 있는 도청에 들어갔다는 증언입니다.

 

같은 책(5·18항쟁자료집)에서 박남선(상황실장, 사형선고)은 이런 증언을 했습니다. “무기를 탈취한 사람들은 광주가 보낸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간 사람들이다.무기고는 광주인들이 턴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5·18항쟁자료집]에는 내무위원장 허규정의 증언도 있습니다. 일부 시민들이 도청에 들어갔다는 말이 들렸다. 나도 다시 도청에 갔다. 갔더니 시국수습대책위원회가 구성돼 있었다. 높아 보이는 사람들은 안 보였다. 23일에 보았던 위엄 있는 국장급 공무원들24일부터는 보이지 않았다. 남은 사람들은 오직 종교지도자들, 교수들 그리고 젊은 사람들뿐이었다. 이들은 모두 사태를 여기서 끝내고 시국을 수습하자고 했다. 나도 멋모르고 참여해 이리저리 휩쓸리다가 내무위원장이 된 거다.”

 

초대 학생수습위원장 온건한 성향의 김창(전남대)의 증언입니다. “윤상원, 정상용, 박효선, 윤강옥은 24일오후에야 도청에 들어왔다. 강경파가 이끄는 항쟁지도부는 26일 아침부터 가동됐다. 김종배가 항쟁지도부 항쟁위원장이 된 것이다. 나는 25일 저녁에 자리를 내놓았다.”

 

526일에 처음으로 구성된 항쟁본부, 대학생 김종배가 사령관이었습니다. 그의 증언이 있습니다. “525, 윤상원, 정상용, 김종배 이렇게 셋이서 투쟁위원회를 짰다. 예비군까지 동원하려 했지만 동원은 못했다. 기동타격대를 구성했는데 대장은 윤석루(19, 무기징역 선고)가 맡았다. 사실 윤석루는 그때 뭘 모르는 어린아이였다. 21일 발포 이후인 저녁에 총이 나왔다. 그런데 그 다음날 수습대책위원회가 설치되어 무기반납을 추진했다. 나는 도청 분수대에 뛰어올라 마이크를 뺏어가지고 사람이 많이 죽었는데 무슨 수습이고 무슨 무기반납이냐 소리쳤다. 26, 우리는 참 외로웠다. 계엄군은 들어온다 하지, 사람들은 계속 빠지고 있지, 이런 상태에서 계엄군과 싸운다는 건 자살행위였다. 나중에 보니 17명이 사망했더라. 박남선(투쟁위원회의 상황실장)은 평시에 알던 사람이 아니라 도청에서 처음 만났다. 도청에서 최후까지 싸운 사람들은 거의 다 모르는 얼굴들이었다.“

 

5.24부터 도청에 들어와 최후순간인 5.27새벽까지 남아있다가 계엄군에 체포된 개념 없는 20대 초반의 사람들이 5.18유공자 최상위의 대접을 받고 있다는 고백입니다. 특히 광주가 자랑하는 기동타격대장 윤석루는 19세의 구두공이었고, 5.18의 로고인물로 알려진 박남선은 5.18당시 24세의 골재채취 운전수였으며, 중학교 2년차에 중퇴하고 1973년에는 절도죄, 1979년에는 협박죄로 각 징역형과 벌금형을 선고받았던 불량배였습니다(1980. 8. 18. 전교사 계엄보통군법회의 피의자신문조서’). 이 사람이 5.18 최상의 인물로 포장되었고, 심지어는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국민배우라는 안성기 역의 주인공으로 포장되어 5.18영웅으로 부상돼 있습니다. 5.18은 그야말로 실체 없는 모래성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외무위원장 정상용의 이어진 증언입니다. 이 증언 하나만이라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항쟁지도부라는 것은 낯모르는 사람들 끌어 모아 임시방편으로 만든 임시조직이었다. 윤상원, , 이강현, 윤강옥 이렇게 넷이서 주로 대책을 의논했다. 25일 이후에 도청에 모인 사람들은 겨우 70-80명 수준이었다. 그나마 얼굴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온건파인 김창길 등을 몰아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박남선이었다. 그가 권총을 쏘며 무섭게 해서 몰아냈다. 19일에 나는 녹두서점에 있었다. 거기서 윤상원을 만나 대책을 의논하다가 21일 총격전이 벌어지자 흩어졌다. 김종배(총사령관)와 허규정(내무위원장)은 도청에서 처음 만났다. 이 두 사람은 조선대 학생이었고, 운동권이 아니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 거기에서 생전 처음 만난 거다.”

 

재미 역사학자 김대령 박사가 쓴 역사로서의 5·18’ 3(329-332)에는 김효섭의 증언이 있습니다. “상원이 형(윤상원, 본명 윤개원)은 그게 자기가 생각해도 잘 안 되겠던지, 이번에는 무기를 개발하자고 했다. 깨진 보도블록을 가지고는 어림도 없으니, 철공소들에 다니면서 쇳토막 하고 나사를 많이 가져오라 했다. 21일 새벽부터 계림동 대인동을 다니면서 나사와 철근토막들을 구해 녹두서점으로 왔다. 그걸 가지고 나가 땡겨보았는데 날카로워 손에 피가 났다. 이거 안 되겠다 생각하고 있는 순간 어디선가 모르게 총이 쏟아져 나와버렸다. 수집한 쇳토막들은 소용없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5·18 최상위 유공자 대우를 받고 있는 사람들은 운동권도 아니고, 23일에 한 사람씩 도청에 갔다가 카리스마 넘치고 위엄 있어 보이는 높은 관료들이 출입을 못하게 해서 주눅들어 가지고 발길을 돌렸다가, 524일 오후부터 각자 초면인 상태로 도청에서 만나 갑론을박하며 다투기만 하다가 5.27.에 점령당한 20대들이었습니다. 이것이 5·18 최고위 반열에 있는 5·18유공자들의 초라한 초상입니다. 이들이 말하는 도청 앞을 지키는 위엄 있어 보이는 관료들은 북한사람인 것입니다. 시위에 불타던 광주에 광주인들이 만든 조직이 전혀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광주사람들은 그냥 몰려다니는 부나비들이었습니다.

 

전남 운동권의 전설이라는 윤한봉5.17계엄령 발동이전에 숨어 다니다 밀항하여 미국으로 도망갔고, 김대중으로부터 김상현을 통해 500만 원을 받았다는 정동년517일 자택에서 체포되었고, 광주 운동권에서 가장 신망 높았던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은 시위 기간 내내 도망가 있었고, 527일 사망한 윤상원은 522일까지도 이리저리 숨어다녔습니다. 5·18유공자들 중 최고 반열에 정좌한 사람들의 증언을 읽어보면 518일부터 21일 계엄군을 도청에서 몰아낼 때까지의 전투 지휘자는 광주에 없었습니다.

 

이상의 모든 증언들에는 521일에 벌였던 신출귀몰하는 군사작전을 광주인들이 주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역력히 증명돼 있습니다. 원심 판결이 진실한 사실에 반하는 것입니다. 이동하는 20사단 차량부대를 공격한 것도 광주인이 한 것이 아니고, 아시아 군납업체에서 군용트럭 400대와 장갑차 4대를 탈취한 것도 광주인이 한 일이 아니며, 4시간 만에 17개 시-군에 감쪽같이 위장돼있는 44개 무기고를 탈취한 것도 광주인이 아니고, 교도소를 5회에 걸쳐 야간공격한 것도 광주인이 아니고, 도청 지하실에 2,100발의 TNT폭탄을 조립해놓은 사람들도 광주인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결론적으로 쨉도 안 되는 광주인들이 감히 맥가이버 수준의 북한군이 벌인 화려한 무공 실력을 자기들의 무용담으로 포장하여 국민과 국가와 세계를 속이는 대범한 사기극을 벌여온 것입니다. 이 부분이 바로 모든 국민들이 분노해야 하는 대목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의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어떻게 쨉도 아닌 당시의 20세 전후의 광주인들이 5·18 최고의 지위에 올라 국회의원도 되고, 1991년 화폐로 많게는 31,700만 원을 일시금으로 받고, 매월 많게는 420만 원, 적게는 50만 원씩의 연금을 받는 호화로운 혜택을 누리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일 것입니다. 20089, 피고는 5·18 관련 4부작 [수사기록으로 본 12.125·18]을 펴낸 다음 이학봉 전 국회의원을 초면으로 만났습니다. 그는 1980년 당시 보안사 합동수사본부 수사단장이었고, 당시 합수부장인 전두환 육군 소장과 한 세트로, 10.2612.12 사건을 주도했던 중심적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그날 피고에게 들려준 말이 위 궁금증에 대한 해답이 될 것입니다.

 

광주 폭동은 국내는 물론 국제사회까지 뒤흔들었던 엄청난 사건 아니었느냐, 광주 계엄 당국이 사건을 마리 짓기 전에 나더러 와 보라고 하더라. 내려가면 세계의 지축을 뒤흔들었던 실력을 가진 어마어마한 놈들이 잡혀 있겠거니, 잔뜩 기대를 걸고 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냐, 눈에도 차지 않는 양아치 피라미들만 잔뜩 잡아놨더라. 어안이 벙벙하더라. 20사단을 습격하고 무기고를 털고 총질을 해대면서 도깨비처럼 날아다녔던 홍길동 같은 놈들은 다 어디로 사라지고, 쨉도 안 되는 피라미들만 잡아놓았다는 것이 도대체 이해되지 않더라. 국민들은 홍길동 급 사형수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데, 참으로 난처하더라. “국민 여러분, 홍길동들은 다 사라지고 양아치들만 잡혔습니다.” 이렇게 정리할 수는 없더라. 수사관들의 고민이 컸다. 그림에 맞게 하려면 피라미들에라도 중죄를 때릴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

 

북괴군이 저지르고 사라진 어마어마한 군사작전에 대한 죄를 피라미들에게 얹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억지로 만들어낸 사형수와 무기수들의 다수가 19세의 양화공인 윤석루, 24세의 골재채취 트럭 운전수인 박남선 같은 양아치나 불량배였고, 그 일부에 대학생 두 명이 끼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후 길어야 2-3년 후에 모두 석방됐습니다.

 

이 군색한 계엄 당국의 처리로 인해 일반 국민들은 이 피라미들이 정말로 폭동의 영웅들인 줄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의 사회를 지배하던 이학봉과 전두환 역시 그 어마어마한 군사행동이 북괴군의 소행일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역사가 이렇게 터무니없이 변질된 것은 5공 실세들의 불성실과 광주의 욕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전두환 내란사건 수사기록을 가지고 연구를 시작한 피고의 전체적인 평가입니다.

 

5.18은 이미 지난 30년 동안 전라도의 이권증서가 되어 있습니다. 이런 시점에서 다른 법원도 아닌 광주법관들이 스스로 역사규명의 현장에 뛰어들어 역사를 아전인수식으로 규명하는 것은 광주의 추태입니다. 법관은 역사를 규명하라고 임명된 존재가 아니라, 역사책 속에 허위사실이 있는지, 거기에 범의가 내포돼 있는지의 여부를 가리라고 임명된 존재일 것입니다. 광주의 역사를 광주법관들이 평가하는 것도 치사한 불법이지만, 한 단계 더 나아가 역사책 속에 허위가 전혀 없는데도 그 역사책의 결론 즉 42개 증거 전체에 흐르는 맥락을 짚은 학자의 의견이 광주의 사욕(私慾)에 반한다는 이유로 벌을 주는 처사는 점령군이나 취할 수 있는 전체주의적 매너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2) 광주 현장사진들의 의미: “1,000여명으로 추산되는 광주시 군중은 광주시를 배타적으로 점령한 북한의 남녀노소 어린이로 구성된 군중이었다!”

 

미지에 대한 학습을 하지 않은 원고와 원심은 노숙자담요의 안면인식능력을 백안시합니다. 5.18 진실규명에 대한 노숙자담요의 노력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백안시했기 때문에 귀원은 피고와 노숙자담요에게 무책임한 기해자가 되었습니다. 노숙자담요의 영상분석은 5.18의 실체를 육안으로 볼 수 있게 해준 역작이었습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피고는 그동안 강요받았던 여러 가지 제약으로 인해 제출하지 못했던 사실들의 일단을 여기에 추가하고자 합니다.

 

(1) 원심이 적대적 이방인으로 여기고 있는 노숙자담요는 5.18연구에 누구도 범접할 수 새 차원의 지평을 열었습니다.

 

피고는 피고와 노숙자담요가 연합하여 이룩한 5.18역사 연구가 이 나라에서 이루어진 그 어느 역사연구보다 장엄하고 방대한 대작이라고 자부합니다. 그 이유를 간략히 기술하고자 합니다. 18만 쪽에 달하는 전두환 내란사건 수사기록, 광수시민들이 모은 목격담과 증언, 북한 당국의 문헌 등을 집대성하여 5.18은 북한이 197910.26 사건 직후부터 북한 특수군 600명을 장장 6개월에 걸쳐 침투시켜 주도한 대규모 게릴라전이었다는 결론을 도출해 냈습니다. 아울러 5.18 최상의 유공자들은 1980518일부터 23일까지의 시위기간에 각자도생하자며 이리저리 숨어다녔다는 사실도 밝혀냈습니다. 광주에서 발생했던 521일만의 상황만 살펴도 그 활동은 광주의 어리바리 한 기층계급의 감히 흉내 낼 수 있는 것들이 아닌 데다, 5.18 최상위 유공자들의 증언들 모두가 광주인들은 시위를 전혀 주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입니다(67). 피고는 이 두 가지 사실을 엮어 5.18은 확실히 북한이 주도했다는 결론을 냈고, 이를 2014.10[5.18분석 최종보고서]에 정리했습니다. 이 최종보고서를 접한 독자들은 이 책에 의해 5.18은 북한 소행이라는 믿음을 확실하게 갖게 되었다고들 말합니다.

 

그런데 그 후 6개월만인 2015.4.부터 광주현장 사진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습니다. 사진 속 주역들의 모습을 보니 그들은 광주의 어리바리한 구두닦이 껌팔이 식당 보이 등이 아니라 세계최강으로 훈련받은 용병급의 몸매들이었습니다. 이 현장 사진들을 보는 바로 그 순간 5.18은 바로 외지에서 투입된 북한특수군일 수밖에는 없다는 확신이 갔습니다. 5.18을 북한이 주도했다는 결론은 문헌연구의 결과였고, 5.18이 북한의 소행이었다면 그 사진 속 주역들은 확실하게 북한사람이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북한의 얼굴이라는 것을 증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이에 필명 노숙자담요가 혜성과 같이 나타나 2015.5.5.부터 광수(광주에 왔던 북한인)들을 찾아내기 시작하여 2019. 3.6.까지 총 661명의 광수를 찾아냈습니다. 661명은 문헌에 기재된 북 특수군 600명보다 많은 숫자입니다. 특수군 말고도 북한 민간인들이 왔다는 이야기입니다.

 

광주현장 사진들은 대부분 1980.5.23. 독일기자 힌츠페터가 두 번째로 광주에 왔던 5.23에 기록목적으로 북한이 촬영한 것들입니다. 피고의 연구에 의하면 5.21.밤 북한 특수군 600명 중 100명 정도는 북한 원정군 본부인 전남도청을 자체방어하기 위해 남겨두고 500명 정도를 교도소 야간공격에 투입시켰다가 권연해 전 안기부장의 증언대로 490명이 죽거나 부상을 당했다는데 475명은 광주에서 사망했고, 부상자 15명은 북한에 가서 1980.6.19.까지 한 사람씩 죽어갔다는 것이 논리적 추론입니다. 여기까지를 법관들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책을 쓴 피고와 그 책을 다 읽기도 않은 법관들 사이에 지면의 한계로 인해 그리고 법정에서 피고와 재판부와의 대면이 없었기 때문에 야기된 소통불능 때문이지, 피고의 연구가 틀린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도 광주법관들은 자기들이 이해하지 못하면 피고의 연구가 허위라고 몰아왔습니다.

 

노숙자담요가 발굴해낸 광수 661명은 하나같이 다 판박이로 보였습니다. 그는 얼굴분석 교과서에 따라 광주 현장의 얼굴과 북한 얼굴이 어째서 동일인인지 알기 쉽게 그림으로 설명해주었습니다. 이를 접한 수많은 국민들이 환호-호응하였습니다. 그의 존재부터 약술하고자 합니다. ‘노숙자 담요를 필명으로 한 것은 노숙자들에 담요가 되어주고 싶다는 뜻에서 지은 필명이라 합니다. 그는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저는 미국이민 1.5세대이며 미 정보기관에서 안면인식 업무를 수행하다가 정년퇴직하여 같은 안면인식 전문가 8명으로 팀을 만들어 중국정부와 계약을 맺고 중국에서 안면인식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는 5.18이 북한의 소행임을 반드시 밝히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나타나기 이전까지 피고는 광주에 투입된 북한 사람들은 오로지 특수군 600명과 이미 남한에 파견돼 있던 고첩들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노숙자 담요는 광주 현장에서 촬영된 구름 같은 군중이 모두 북한의 남녀노소 어린아이들로 구성된 북한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북한 특수군 600명 이외에도 북한 민간인 집단 900여 명이 통제된 상태에서 이리저리 구름처럼 몰려다니면서 광주시를 배타적으로 장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때 광주시민들은 날아다닌다는 총알에 맞는다며 공포분위기에 휩싸여 모두 이불을 쓰고 집에 숨어 있었습니다. 이들 북한 군중은 서로가 서로를 잘 알고 있는 같은 분야 사람들 단위로 묶여서 몰려다니게 하였습니다. 외교분야 팀, 배우 등 연예인팀, 예술인 팀, 작가 및 화가팀. 조총령 팀. . 이들 팀 속에 어쩌다 낯선 얼굴이 들어오면 금방 남한 스파이로 의심받았습니다. 군중이 북한 말씨를 사용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김일성이 국제재판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기도비닉이 제1의 보안사항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진에 나타나 있듯이 군중 속에 들어갔던 낯선 얼굴 4명의 광주인들이 연행되어 즉결처분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일반 상식인들은 북한이 어떻게 600명이나 되는 북한 특수군을 한꺼번에 침투시켰는가, 그 많은 병력이 어떻게 들키지 않고 내려왔는가라는 표현으로 600명의 침투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합니다. 김일성은 197910.26 사건 직후부터 6개월 동안 10-30명의 소단위로 게릴라를 충분히 투입시켰다는 것이 이 사건 도서에 설명돼 있습니다. 특수군 600명이 침투했다는 사실도 인정하려 하지 않는 마당에 어떻게 광주 현장의 군중사진에 나타나 있듯이 세 살배기 아이, 업힌 아이, 안긴 아이들까지 데려왔느냐에 대한 의문이 있습니다. 이사건 도서 87쪽에 바로 이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당시의 군작전은 계엄군 지휘계열에 의해 주도되었습니다. 군에는 양병 지휘관이 있고, 용병지휘관이 있습니다. 당시의 합참의장, 해군 총장은 계엄 계열의 지휘관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광주 진압을 위한 군 작전 지휘선상에세 제외됐던 합참의장 류병현 대장이, 작전 지휘 선상에 있지 않은 또 다른 해군총장 김종곤 대장을 통해 전남해안을 경비하던 해군부대 모두를 전북 변산반도 이북으로 이동 배치시키는 조치를 취한 사실이 류병현 회고록 453쪽에 기재돼 있습니다. 2명의 4성장군이 월권하여 전남해안을 텅텅 비어준 것입니다. 6.25초기에 군 작전을 간첩이 지휘한 사실과 일맥상통합니다. 이런 연구의 내용이 사실이냐 아니냐? 이것을 규명하는 것은 학문의 영역이지 사법부의 영역이 아닐 것입니다. 책의 내용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느냐? 이 역시 독자 시장이 판단하는 것이지 사법부가 판단할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진에 나타난 깨알같이 많은 군중에서 노숙자담요는 2015.5.5.부터 2019.3.6.까지 만 310개월 동안 무려 661명이나 되는 광수를 찾아냈습니다. 이는 초인적인 업적입니다. 그러면 그동안 없었던 현장 사진들이 어떻게 2015년에 쏟아져 나왔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이 의문에 대해 약술하고자 합니다. 광주 현장사진들은 기록을 남기기 위해 북한이 독점하여 촬영한 것이고, 광주에 두 차례 찾아간 힌츠페터는 사진을 찍으러 간 것이 아니라 북한이 찍어놓은 사진을 가지러 간 것이며 힌츠페터의 임무는 가져간 사진을 전 세계에 방송하는 것이고 2013년 채널ATV조선이 5.18은 북한소행이라는 내용의 5개월 동안 특별프로를 만들어 연속 방송을 하자, 다급해진 광주신부들이 푸른 눈의 목격자라는 독일 기자 힌츠피터를 독일로 찾아가 필름을 모두 가져왔고, 이 사진들의 성격을 모르는 5.18기념재단이 이 사진들을 노출시켰을 것입니다. 피고는 원고측과 형사소송을 진행하면서 증인신문 과정에서 이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힌츠페터는 북한과도 결합돼 있고, 김대중의 반국가단체 한민통 주역들과도 결합돼 있는 북한 동조자이자 5.18 부역자였습니다.


단 한 시간도 남을 위해 봉사하지 않으려 하는 사회에서 노숙자담요는 돈 한 푼 바라지 않고 오로지 애국심과 자아성취의 일념 아래 무려 310개월 동안이나 시력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해 주었습니다. 이런 노력을 범죄라 하는 것은 언어도단이고 죄악입니다.

 

2026.1.17.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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